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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언제까지 김연수 타령을 할 생각이냐고 말하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김연수의 글을 읽는 것은 거의 기복신앙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인생의 많은 순간들을 나는 김연수의 글에 기대어 지나왔다. <7번 국도 revisited>가 아니었다면 2011년의 여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아니었다면 몇 차례의 실연을 극복하는 데에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청춘의 문장들> 속 '군불견'이 아니었다면 변호사시험 직전의 마지막 6개월이 훨씬 더 막막했을 것이다.
그 글들이 뭘 당장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글들을 읽고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됐다. 그러니까 시험에 떨어지거나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결코 내 세상이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정말로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나에게는 그게 마치 김연수의 충고가 맞아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물을 조심해야 해, 라는 뻔한 점쟁이의 예언을 호들갑떨며 섬기는 사람처럼(조심하지 않으면 어쩔 셈인가? 물이든 불이든 평생을 두고 조심하는 게 당연하다) 이십 대의 십 년이 지나갔다.
작년 <일곱 해의 마지막>을 끝으로 한동안 김연수를 읽지 않았다. 사실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런데 그제 일 년 삼 개월 간 몸담았던 팀을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다가 문득 김연수 생각이 났다. 마음이 불안할 때 연등에 이름을 써 띄우거나 묵주기도를 하듯, 자연스럽게 김연수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밀리의 서재에 김연수를 검색하자 <지지 않는다는 말> 한 권만이 떴다. 작가의 말 중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건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만 하는 어떤 행위를 뜻한다. 전후에 태어난 우리는 모든 싸움은 이겨야만 한다고 배웠다. 패배자가 되면 어떤 대접을 받는지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생생하게 경험했다. 그러니 축구마저도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온 국민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졌다고 생각하고 그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그게 바로 "졌다, 졌어. 진 거야"라는 반어적인 체념이 아닐까?
(...)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지지 않는다는 말>)
모든 순간을 전쟁으로 사는 일에 대해서라면 나 역시 모르지 않는다. 전쟁이 터져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때문에 전쟁이 되는 것이다. 나의 삼십 년 중 상당한 시간은 순위를 매길 필요 없는 일에 자꾸 순위를 매기는 데에, 그리고 그중 상위권에 들기 위해 기를 쓰고 싸우는 데에 바쳐졌다. 그런 순간에 김연수를 읽으면 문득 맥이 풀렸다. 꼭 이기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역설적으로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말하자면 결승점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와 같은 말을 보아도 긴장을 풀기가 어렵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완주 여부보다는 기록 경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이제는 김연수가 목표하는 독자층의 나이를 벗어나버린 것일까? 김연수의 예언이 어쩐지 심상하게만 들리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어린애의 자기위로처럼 느껴진다. 그 위로 여전히 이기고 싶은 마음이 머리를 쳐든다. 그 마음이 곧장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든다. 결과를 보기도 전에 냅다 졌다, 졌어, 진 거야,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내일이면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긴장한 탓에 손톱 밑을 잔뜩 뜯었지만, 남은 밤은 침착하게 <지지 않는다는 말>을 마저 읽어볼 작정이다. 졌다, 졌어, 진 거야, 라고도, 반드시 이길거야, 라고도 말하지 않고 묵묵히 남은 트랙을 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심상한 예언에 매번 새롭게 놀랄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며. 기복신앙마저 먹히지 않는다면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낼 자신이 없다. 물에 빠진 베드로의 마음으로 걸어보겠다.
(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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