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는 유독 이영광의 과 권여선의 을 곱씹어보는 밤이 잦았다. 전자는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후자는 '언제든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단검처럼 지니고 살'아왔던 사람에 대한 사랑을 다루는 작품이다. 그 마음이 유독 애틋하고 사무쳐서 12월에는 자주 잠을 설쳤다. 과 이라면, 눈치 빠른 사람은 바로 또 다른 글 하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신형철의 그 유명한 칼럼, 다. 신형철은 이 글에서 이영광과 권여선을 사랑이라는 키워드 아래 한데 호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안쓰러워 그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마음을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더 정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사랑의 의미에..
김승일의 말마따나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눈물이 나는 날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그런 날이 몇 번 더 반복되었고, 그럴 때마다 이 미완의 글을 꺼내보았지만, 마무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의 사랑이자 자랑을 만나고 온 날, 문득 이 글을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세상에 노래란 게 왜 있는 걸까? 너한테 불러줄 수도 없는데." 너에게 불러줄 수 있는 노래를 나는 부르고 싶은 것이다.나의 사랑이자 자랑을 위한 비상약- 김승일의 - 시를 왜 읽을까? 이런 난처한 질문을 종종 맞닥뜨린다.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을 하자면 글이 훨씬 길어지겠지만, 우선 이렇게만 말해두자. 나에게 시는 두 가지 부류다. 나를 무너뜨..
서른한 살의 여름을 내수동에서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문장의 방점은 서른한 살에도 있고 내수동에도 있다. 나의 이십 대 중 사진처럼 기억에 남는 장면은 대개 내수동 근처에서 박제되었다. 씨네큐브의 좌석에 파묻혀 공강 시간을 보냈고, 이쾌대의 그림을 보러 덕수궁에 갔다. 지금은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애인들과 각기 다른 시각 같은 골목을 돌아다니는 와중에, 어떤 날에는 서촌블루스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경복궁 근처에서 카페인과 알코올을 연료로 비평 레포트를 썼다가, 다음 날 맑은 정신이 되면 전부 지웠다. 그렇게 청춘을 낭비하는 내내 한 번쯤 이 동네에서 살아본다면 어떨까 상상했지만, 청춘을 낭비하는 자는 청춘 너머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법이므로 그 상상 속에 삼십 대의 나는 없었다. 그런..
권여선의 에 대해 올 봄에 쓴 비평이다. 라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만용을 부렸고, 그런 탓에 라캉의 이론에서 빌려온 어떤 개념들은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전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내게 알려준 사람을 생각하며, 또 내가 를 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옮긴다. 너무 좋아하면 오히려 쓰기 어려운 법이라고 네가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글은 그 시절을 건너 씌어졌다. 성장을 전복하는 성장 - 라캉에 기대어 권여선의 《푸르른 틈새》 읽기 - 1. 들어가며 권여선의 《푸르른 틈새》를 성장소설이라고 칭하는 것은 새로울 것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을 진정한 성장소설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머뭇거림이 필요하다. 성장소설이란 무엇인가. 최현주에 따르면 성장소설은 처음의 결핍..
누군가는 언제까지 김연수 타령을 할 생각이냐고 말하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김연수의 글을 읽는 것은 거의 기복신앙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인생의 많은 순간들을 나는 김연수의 글에 기대어 지나왔다. 가 아니었다면 2011년의 여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가 아니었다면 몇 차례의 실연을 극복하는 데에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속 '군불견'이 아니었다면 변호사시험 직전의 마지막 6개월이 훨씬 더 막막했을 것이다. 그 글들이 뭘 당장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글들을 읽고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됐다. 그러니까 시험에 떨어지거나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결코 내 세상이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정말로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
그렇지 않은 대중가요가 있겠냐만은, 아이유의 은 특히 욕망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앨범이다. 은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두루 아우른다. 여기서 아우른다는 말은 단순히 그 둘을 같은 곡 안에서 함께 다루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은 서로 다른 욕망이 관계맺고 상호작용하며 뻗어나가는 양상을 그린다. 말하자면 은 욕망의 착종 상태를 다루는 것이다. 네 욕망이 내 욕망을 유발하는 과정, 네 욕망을 이용해 내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그 앨범에는 있다. '제제'는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곡이다. 오랫동안 아이유는 로리타 컨셉을 이용해 팬층을 구축해왔다. 이것은 물론 자신을 님펫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작업에서 아이유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어른 남성의 시선보다는 차라리 자..
꽃병(-病)을 앓는 그런 날에는 - 한인준의 - 한인준의 많은 시들은 시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시작노트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어떤’ 말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사람들”()나 “어쩌면 우리는 구름을 구름 ‘같다’고 불렀던 사람들”()과 같은 구절에서 시인의 말에 대한 고민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인에게는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시인으로서는 도무지 발화 불가능한 것이어서, 입을 여는 순간 그는 곧바로 “저기로 가도 저기를 여기라고 부르고 말”()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안다. 알면서도 입을 연다. 한인준의 많은 시들이 바로 그런 순간들을 다루는 데에 바쳐진다. 이 역설, 실패하고 말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무언가를 말..
극을 극답게 만드는 것 - 연극 *, 피지컬 씨어터 ** - 극을 구성하는 4대 요소로 흔히 배우, 무대, 관객, 그리고 희곡을 꼽는다. 한 편의 극을 상연하기 위해, 배우와 관객은 필연적으로 무대라는 공간 위에서 희곡의 진행에 필요한 시간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극은 시공간의 예술이다. 좋은 극은 결코 텍스트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는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그 극을 체험할 따름이다. 최근 그 당연한 사실을 한 번 더 환기시켜 주는 좋은 극을 둘이나 만났다. 첫 번째는 이다. 이 극을 굳이 텍스트로 환원하자면 ‘삶과 죽음, 수동태와 능동태, 두 축이 만들어내는 네 개의 사분면’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 극의 가장 좋은 부분은 이미 빠져 나가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