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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한 살의 여름을 내수동에서

yellowbag 2023. 7. 17. 00:00

  서른한 살의 여름을 내수동에서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문장의 방점은 서른한 살에도 있고 내수동에도 있다. 나의 이십 대 중 사진처럼 기억에 남는 장면은 대개 내수동 근처에서 박제되었다. 씨네큐브의 좌석에 파묻혀 공강 시간을 보냈고, 이쾌대의 그림을 보러 덕수궁에 갔다. 지금은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애인들과 각기 다른 시각 같은 골목을 돌아다니는 와중에, 어떤 날에는 서촌블루스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경복궁 근처에서 카페인과 알코올을 연료로 비평 레포트를 썼다가, 다음 날 맑은 정신이 되면 전부 지웠다. 그렇게 청춘을 낭비하는 내내 한 번쯤 이 동네에서 살아본다면 어떨까 상상했지만, 청춘을 낭비하는 자는 청춘 너머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법이므로 그 상상 속에 삼십 대의 나는 없었다. 그런데 찬물을 뒤집어쓴 듯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나는 내수동에 혼자 거주하는 서른한 살의 여자가 됐다.
  내가 사랑하는 동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다는 건 내가 사랑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것과 같다. 말인즉슨, 사실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십 대의 오랜 기간에 걸쳐 그려온 이 동네의 지도가 요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편되어 가고 있다. 이 길로 내려가면 나의 회사, 저 길로 꺾어들어가면 나의 자취방. 한때는 버스를 타고 이 동네를 지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뻐근해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곧장 쓰레기봉투를 파는 편의점을 찾아 들어가곤 한다. 공간의 힘만으로도 충분해서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좋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그 공간이 어디가 되었든 뭔가를 해야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실용에 잠식되어 가는 과거의 낭만이 못내 아쉽다. 더 무서운 것은, 언젠가 이 아쉬움조차 아쉽지 않을만큼 닳아버릴 나의 마음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동네 곳곳에 숨겨둔 기억들은 나를 먹여살린다. 얼마 전 혼자 정동에 밤 산책을 갔다가 높은 곳에서 내수동을, 서울 북쪽을 내려다보며 간만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 곳곳에 숨겨둔 십 년 치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 온 탓이다.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한 장소를 오래 응시함으로써 그 장소에 퇴적된 역사를 한눈에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내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역시 그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은 영원히 흘러가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장면들이, 이 도시를 오래 응시하고 있자면 여전히 내 안에 겹겹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낭비된 시간의 힘으로 서른한 살의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 이십 대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방식으로.
  과거의 낭만이 현재의 실용이 될 수 있다면, 그 실용의 일상이 미래에는 또 어떤 낭만이 되어 나를 먹여살리게 될지 모른다. 마흔한 살의 나는 삼십 대에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또 살아가고 있겠지. 서른한 살의 여름을 내수동에서 보내면서, 아직은 그려지지 않는 마흔한 살의 나를 위해 이런 일기를 남겨둔다. 내 이십 대의 어떤 장면들이 사진처럼 박제될 수 있었던 건 팔 할이 일기의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장면들이 많을수록, 아쉬움을 아쉬움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천천히 닳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른한 살의 오늘 하루치 기억은 회사에, 정독도서관에, 미술관 옆 돈까스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묻어두고 왔다. 이 기억도 언젠가 한꺼번에 나를 덮쳐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을 기꺼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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