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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에서 시 쓰기

yellowbag 2022. 1. 8. 21:24

이런 세상에서 시 쓰기

- 영화 <동주> -

 
  제목은 ‘동주’만을 호명하고 있지만, 기실 영화 <동주>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윤동주(강하늘 분) 한 사람만이 아니다. <동주>는 윤동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송몽규(박정민 분)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에 기대어 일본과 윤동주의 대립구도를 그리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대신에 작품은 윤동주와 송몽규 간의 묘한 긴장과 갈등을 조명하는 데에까지 나아가고, 그럼으로써 이런 질문을 제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런 세상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윤동주가 자신의 시편들을 통해 끊임없이 자문했던 것이기도 하니,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영화 <동주>에의 감상평이면서 동시에 윤동주의 시에 대한 감상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대립은 거칠게 말하자면 문학과 현실의 대립이다. 문학 그 자체에 집중하고자 하는 윤동주와 달리 송몽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도구로서 문학을 파악하고, 이러한 문학관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문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날을 세운다. 두 사람의 삶 또한 이러한 차이에 기인해 달라지는데, 송몽규가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것과 달리 윤동주는 조선어로 시를 쓰는 등의 소극적인 저항을 지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문학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윤동주의 저항은 여러 사람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윤동주의 아버지는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학문이라며 그의 문학 공부를 반대하고, 일본 형사는 윤동주의 삶을 송몽규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며 비웃는다. 윤동주 자신조차도 영화 말미 이런 절규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것이 부끄러워서…….” ‘이런 세상’에서, 문학은 언제나 앞장서지 못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몫일뿐이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은 정말 무의미한 것인가? 상기(上記)한 절규 뒤, 윤동주는 일본 형사가 내민 진술서를 앞에 두고 이렇게 선언한다. “……서명을 못하겠습니다.” 윤동주가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윤동주 시 세계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바로 그 ‘부끄러움의 힘’이다. 영화 속 정지용도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만이 역설적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는 순간, 작가가 가진 반성과 성찰의 태도는 시간차를 뛰어넘어 작품의 독자에게로 옮아온다. 윤동주의 힘이 여기에 있고, 윤동주가 사랑했던 문학의 힘이 여기에 있다.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싶다는 윤동주의 청에 송몽규는 “너는 시를 쓰라”는 말로 그를 돌려보낸다. 이 거절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친구를 위험에 내몰고 싶지 않은 송몽규의 애정과 염려일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가 가진 부끄러움의 힘을 생각해볼 때, 송몽규의 이 말은 한편으로는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너는 시를 쓰라, 그것이야말로 네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현실에의 참여이므로. 그리고 송몽규가 옳았다. 윤동주의 시는 오래 살아남았고, 지금까지도 우리를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못하도록 돌려세우는 거울이 되어주고 있다.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최근 건국 이래 최대 대학지원 사업이라는 교육부의 프라임 사업 최종 결과 발표가 났다. 수요가 없는 전공 분야의 정원을 감축하여 미래 수요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를 증원하라는 정부의 요구에, 대부분의 대학이 인문계열 정원을 축소하겠다는 응답을 내놓은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시를 쓰고 문학을 한다는 것이 대학 측에서는 말마따나 현실의 ‘그림자’에 불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그림자부터 없애나가자는 이야기일 테다. 그런데 그림자가 없는 곳에는 둘 중 하나다. 존재가 없거나, 빛이 없거나. 이런 세상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바로 세상에 존재와 빛을 돌려놓으려는 소망의 문학적 실천이다. 윤동주가 살았던 백여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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