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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을 극답게 만드는 것

yellowbag 2022. 4. 26. 17:25

극을 극답게 만드는 것

- 연극 <죽음의 집>*, 피지컬 씨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 -


극을 구성하는 4대 요소로 흔히 배우, 무대, 관객, 그리고 희곡을 꼽는다. 한 편의 극을 상연하기 위해, 배우와 관객은 필연적으로 무대라는 공간 위에서 희곡의 진행에 필요한 시간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극은 시공간의 예술이다. 좋은 극은 결코 텍스트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는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그 극을 체험할 따름이다.
최근 그 당연한 사실을 한 번 더 환기시켜 주는 좋은 극을 둘이나 만났다. 첫 번째는 <죽음의 집>이다. 이 극을 굳이 텍스트로 환원하자면 ‘삶과 죽음, 수동태와 능동태, 두 축이 만들어내는 네 개의 사분면’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 극의 가장 좋은 부분은 이미 빠져 나가 버리고 만다. 이 극의 매력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결코 겪을 수 없는 ‘죽음’을 ‘죽음의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90분 동안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극을 보고 나오는 길이면 생의 감각 하나가 더 열린듯한 기분이 든다.
또 다른 극은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다. ‘피지컬 씨어터’를 표방하는 이 극은 대사를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음의 집>보다도 더욱 체험의 영역에 가깝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70분 동안 배우들의 움직임과 음악을 통해 오감으로 깨닫게 된다. 이것은 유효하고도 적확한 전략인데, ‘기억’은 텍스트로 재구성될 수 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텍스트로 재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런 작품은 극이 아닌 다른 장르로는 결코 변환될 수 없다.
이런 극들의 가장 아쉬운 점은 추천의 글을 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의 집> 마지막 장면에서 조명이 객석을 비출 때 온몸을 덮치던 전율을, <네이처 오브 포겟팅> 마지막 장면에서 조명이 꺼질 때 이유도 모른 채 쏟아지던 눈물을 텍스트로 다시 옮기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신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특정한 시공간에서만 작동한다는 점에서 극은 비효율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이런 극들은 그 비효율을 기꺼이 감당할 가치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극들은 그 비효율을 통해서만 말해진다. 그 비효율을 당신도 기껍게 감당하기를, 그리하여 극이 아니라면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220422 밤, 이강욱 박용우 김훈만 문현정
** 220425 밤, 김지철 김주연 마현진 김치영 조한샘 강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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