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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푸르른 틈새>에 대해 올 봄에 쓴 비평이다. 라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만용을 부렸고, 그런 탓에 라캉의 이론에서 빌려온 어떤 개념들은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전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르른 틈새>를 내게 알려준 사람을 생각하며, 또 내가 <푸르른 틈새>를 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옮긴다. 너무 좋아하면 오히려 쓰기 어려운 법이라고 네가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글은 그 시절을 건너 씌어졌다.
성장을 전복하는 성장
- 라캉에 기대어 권여선의 《푸르른 틈새》 읽기 -
1. 들어가며
권여선의 《푸르른 틈새》를 성장소설이라고 칭하는 것은 새로울 것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을 진정한 성장소설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머뭇거림이 필요하다. 성장소설이란 무엇인가. 최현주에 따르면 성장소설은 처음의 결핍·미완전·미숙이 대체로 충족·완전·성숙으로 귀결되는 서사다. 이 발전적이며 도덕적으로 우월한 플롯이 그려내는 한 인간의 성장은, 한편으로는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이면서도 결국에는 그 아버지가 지배하는 세계로의 조화로운 편입을 의미한다. 이 장르 문법을 라캉 식으로 바꿔 말해보자. 성장의 서사는 한 인간이 남성적 질서로 구성된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궤적이다. 이 인물은 아버지를 부정하지만 결국에는 부정했던 아버지와의 화해를 모색하고, 아버지의 질서가 지배하는 상징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인가? 라캉은 상징계로의 진입이 주체 탄생의 드라마이면서도 동시에 주체 소외의 드라마라는 점을 지적한다. 상징계 속에서 주체는 아버지의 기표에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 기표는 근본적으로 타자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표는 주체에 대해 이질적이며 주체의 존재를 완전히 대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최현주가 충족·완전·성숙이라고 불렀던 성장의 도착지는, 사실은 존재가 자신과는 무관한 이름을 뒤집어쓰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비극적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많은 성장소설이 상징계에 무사히 안착하는 것만으로 성장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급하게 마무리한다. 이런 소설들은 사후 복종이 빚어내는 병리적 징후들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성장 신화에 가깝다. 진정한 성장소설은 오히려 성장소설의 문법을 전복하면서 씌어진다. 진정한 성장소설에는 ‘충족·완전·성숙’이라는 상징계의 환상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상징계에 끝내 포섭되지 않는 실재 그 자체를 꿈꾼 흔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흔적을 가진 성장소설만이 라캉의 윤리학1에 의해 긍정될 수 있다.
권여선의 《푸르른 틈새》는 라캉의 상징계에서 언제나 타자로만 규정되는 여성을 주인공의 위치로 불러들인다. 《푸르른 틈새》를 진정한 성장소설이라고 부르기에 앞서, 우리는 그 주인공 ‘미옥’을 앞에 두고 잠시 머뭇거려야 한다. 그녀는 분명 성장 신화 속의 소년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말인가. 이 글은 그 머뭇거림에 의해 쓰인 글이다. 이 글의 끝에서, 권여선식 성장 서사의 참모습과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2. 소녀는 남근이 될 수 있을까
《푸르른 틈새》는 서른 살의 미옥이 과거의 특정 시기들을 기억하고 반추하는 식의 회고담 형태를 취한다. 유소년기의 기억과 청년기의 기억이 이 회고담을 구성하며, 이때 유소년기의 기억은 다시 가정에서의 기억과 학교에서의 기억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을 각각 x축과 y축으로 삼는다면, 유소년기의 가정·유소년기의 학교·청년기의 대학이라는 세 영역을 미옥이 맞닥뜨린 세 상징계로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이 그래프 위에서 미옥이 그리는 궤적을 쫓아나간다.
라캉의 상징계에서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범주는 언제나 남성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상징계에 진입하려는 존재는 본성상 남성적일 것을 요구받으며, 여성적 속성을 간직한 존재들은 그 안에 진입하지 못하고 타자화되어 정체를 알기 힘든 것으로 남게 된다. 소설 속 세 상징계 역시 마찬가지다. 미옥이 상징계에 자리 잡고자 할 때, 이 상징계들은 그녀에게 중성적이며 나아가 남성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지 않는다면, 성적인 농담들을 대범하게 받아 넘기지 못한다면, 불결한 화장실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이들은 결코 미옥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에 미옥은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이 마음은 곧 남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다음의 세 대목이, 각각의 상징계에서 미옥이 보이는 남근과의 동일시 욕망을 잘 보여준다.
강해지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내 속에서 한결같았다. 더 이상 어머니 주변을 맴돌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열한 살 그때도 나는 똑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문 밖에 서서 대문 안쪽을 노려보며 어머니의 착한 딸이기를 포기했던 그 때, 그러나 결국 시시껄렁하고 채신없는 짓만을 저지르고 다니게 된 그때도 나는 내가 더 강해지기를 빌었으며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고 믿었다. (91쪽)2.
민자네는 나에 관한 한 자기들이 즐기는 어른스런 이야기의 재미와 맛을 조금도 이해할 줄 모르는 애라고 굳게 판단하고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농담들의 의미를 뒤늦게나마 혼자 힘으로 밝혀보려 했지만 기괴한 그 말들을 되풀이하는 것만도 힘에 겨웠다. (69쪽)
이런 시선들은 내 안에 내숭 떠는 여자에 대한 혐오를 심어놓았다. 내숭 떠는 여자의 이미지에는 항상 그와 비슷한 또 하나의 비판적인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거나 적어도 그런 상태를 열망하는 사치스런 여자의 이미지였다. (중략) 불결, 음담패설, 궁핍, 고통 등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숭 아니면 사치였다. 나는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학생들이 흘리는 음담패설에 그 정도쯤이야 하는 얼굴로 함께 웃었고, 벌레를 보고도 심상찮게 툭 털어내든가 눌러 죽였고, 남자 화장실 문이 잠기지 않아 한 손으로 문고리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 어렵사리 바지를 내리거나 올리면서도 볼일을 보고 나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침을 한 번 칵 뱉었다.’ (75-76쪽)
남근과의 동일시를 위해 일련의 노력들이 시행된다. 그렇다면 미옥은 욕망의 최종적인 성취에 성공하는가? 물론 실패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옥이 생래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미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여성적인 속성들은, 그녀의 눈물겨운 부정(否定)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끌어안고는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
“……미옥인 너무 약해.”
나는 엎드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이번 농활에서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종태 목소리였다.
“점점 좋아지고 있긴 한데, 보고 있으면 왠지 불안불안하더라.”
이건 수진의 말이었다. (91쪽)
강함을 증명하려 할수록 미옥의 약함은 역설적으로 엄연해진다. 상징계들은 남근이 되는 데에 실패한 그녀를 받아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로 갈 것인가.
3. 소녀는 남근을 가질 수 있을까
라캉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보편적 범주를 남성에게 내준 여성은 언제나 남성과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 위치가 규정된다. 스스로 남근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미옥은 이제 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위치를 찾아주고 그녀를 상징계로 진입시켜 줄 대리자로서의 남근을 찾아야 한다. 그녀의 욕망은 ‘남근 되기’에서 ‘남근 갖기’로 옮아간다.
존재가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만나는 남근은 물론 아버지의 그것이다. 뱃사람으로서 열 달간 집을 떠나 있다가 두 달간 집으로 돌아와 머무르는 미옥의 아버지는, 유소년기의 미옥을 가정이라는 상징계로 진입시켜 주는 첫 번째 대리인이다. 그는 “휴가를 나오면 나를 한시도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고 내 옆에 꼭 붙어서 나를 토하지 않게 해주고 나를 귀애해주고 내 입에 맛있는 반찬을 넣어주고 내가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해주”(226쪽)는 방식으로 미옥의 위치를 규정한다.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자리를 부여받으며, 미옥은 비로소 상징계에 안착할 수 있게 된다.
유소년기의 학교에서는 “어른스럽게 내 머리를 가다듬어주고 내 옷을 바로잡아주고 어딜 가나 내 손을 꼭 붙들고 다니는”(71쪽) 해수3가, 청년기의 대학에서는 “여자가 향유할 수 있게끔 되어 있는 모든 특권들을 향유할 수 있”(225쪽)게 해주는 한영이 각각 아버지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아버지-존재들과 미옥 간에 이루어지는 등가교환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꽃핀을 주면 나는 머리를 길렀고, 내 머리의 길이에 비례해서 그의 찬사의 수위도 높아만 갔다. (225쪽)
아버지-존재들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미옥을 호명하고, 그녀는 그 부름에 여성적인 행동으로 응답한다. 아버지-존재들의 부름에 기대어 미옥은 드디어 그들이 관할하는 상징계에 진입한다. 아버지의 딸, 해수의 단짝, 한영의 연인이라는 자리가 그녀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 자리에 앉음으로써, 그녀는 그녀의 약함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공주(公主)’로서 대접받는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앞서 언급했던 성장 신화의 ‘충족·완전·성숙’이라는 목표를 미옥은 완전히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몇 번의 실패와 그에 따른 전략의 수정을 거쳐 마침내 아버지가 지배하는 세계에 조화롭게 편입했다. 미옥의 탄생에 드리워져 있던, 딸이 열 아들 노릇 하게 되리라는 아버지의 ‘파랑새 신화’가 이 지점에서 순탄하게 꽃을 피운다.
그러나 상징계로의 편입이 절대적이며 완전한 충족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실재를 갈망하는데, 이 실재는 상징계의 언어로 끝내 환원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푸르른 틈새》가 성장 신화의 문법을 전복하며 포착해 낸 진실이 여기에 있다. 실재는 상징계의 언어 사이를 미끄러지며 빠져나간다. 아버지가 미옥에게 부여한 ‘여자’의 이름은 미옥의 실재를 결코 완벽히 대리할 수 없다. 성장 신화의 종결과 함께, 《푸르른 틈새》는 비로소 진정한 성장소설로의 도약을 시작한다.
4. 남근을 배반할 때 소녀는 어른이 된다
미옥은 그녀를 타자의 자리에 위치시켰던 아버지-존재들을 배반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외면하고, 해수의 연락을 무시하며, 한영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런데 이 배반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그녀의 의식은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 거침없는 제스처와 달리 미옥의 서술은 자꾸 더듬거린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이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그녀의 의식은 항변하는 것 같다. 정말 그런가.
나의 가을에는 언제나 은밀한 배반이 준비되고 있었다. (123쪽)
미옥의 배반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준비의 산물이다. 누가 준비했는가. 그녀의 의식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하기는 했지만, 결국 이 배반의 동력은 무의식 속에 숨어있었던 그녀의 욕망이다. 의식이 차마 설명해내지 못하는 상징계의 균열을, 언제나 의식보다 먼저 달려 나가는 무의식의 욕망은 읽어낸다. 상징계에는 욕망이 원하는 실재가 없다. 그러므로 욕망의 윤리에 따르자면 상징계는 필연적으로 몰락해야만 한다. ‘은밀한 배반’이 그 몰락을 가능케 한다.
이제 나는 낯선 거울을 통해 그 감정의 배후에 있는 두 겹의 욕망, 두 명의 여자를 본다. (204쪽)
아버지에의 배반과 상징계의 몰락 속에서 미옥은 ‘낯선 거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한다. 남근이 되고자 했지만 그것은 미옥이 아니었고, 남근을 가짐으로써 그 남근의 상대자가 되고자 했지만 그것은 또한 미옥이 아니었다. 미옥은 자신의 실재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범주 내에서 어느 한 쪽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 안에는 ‘두 겹의 욕망, 두 명의 여자’가 있다. 이 사이에서 흔들리며 그린 진동의 궤적, 그것이야말로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미옥의 실재이자 본질이다.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한 그래프에서 그녀는 어느 한 점으로 찍히지 않는다. 배반과 몰락 끝에 그녀가 확인한 그녀 스스로의 정체성은, 언어적 정태(靜態)가 아니라 실존적 동태(動態)다.
이 동태가 그리는 자취를 좀 더 따라가 보자. 그녀의 배반 이후 아버지는 사고로 죽고, 해수는 자살하며, 한영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초래한 이 비극적 결과와 그로 인한 죄의식을 미옥은 도대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많은 성장 신화 속 소년들은 아버지를 죽인 후에 괴로움을 못 이겨 자신의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가 된다. 이럴 때에 그들은 도덕적이다. 그러나 이 도덕은 라캉이 제시한 욕망의 윤리학적 관점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소년들의 사후 복종은 그들을 아버지의 상징계로 재진입시키고, 상징계와 실재의 괴리는 해소되지 못한 채 병리적 징후들을 불러일으킨다.
미옥은 소년들과는 다른 곳으로 간다. 아버지의 질서와 남근의 권력이 무너진 자리에서 미옥의 욕망은 폭주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자 상징계의 첫 번째 법령이기도 한 근친상간의 금기에까지 그것은 가닿는다. 다음 대목을 본다.
엄격히 단속된 여자의 내부에서도 도저하게 흐르고 있는 욕망, 금지가 절대적이면 절대적일수록 극단화되는 욕망,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낳아준 자와의 성교이다. (171쪽)
효성지극함과 불효막심함의 심연을 목숨 걸고 재주넘는 뱅퇴유 양의 사디즘은,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그 짓을 빨리 실행해보고픈 유혹, 한시바삐 그 불가능한 도약을 실현하는 주체가 되고픈 유혹을 선사한다. 그리고 파랑새 신화의 주역인 나 꼭지 또한 세상의 모든 딸들 중 하나이다. (258쪽)
아버지가 죽은 날, 파랑새 신화의 주역인 미옥은 자위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때 “우직한” 미옥의 “육체는 말없이 죽은 아버지를 불러들”(275쪽)인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뱅퇴유 양처럼,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는 쾌락의 절정으로 가고자 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상상적 근친상간을 도모하는 것이다. 설령 상상적인 것일지라도 근친상간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인 동시에 상징계에의 진입에 있어 가장 먼저 금기시되는 욕망이다. 그러나 상징계를 무너뜨린 미옥에게 금기는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의 자위는 상징계를 넘어 실재계로 향하는 도약의 마지막 제의다.
내 탄생의 날, 아버지는 새벽하늘의 한 자락을 걷어 그 틈새로부터 어여쁜 파랑새를 만들어냈지만,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탈진한 클리토리스, 피에 젖은 새 한 마리를 만들어냈다. 아버지는 끝내 파랑새를 기르는 데 실패했고 나는 젖은 새를 죽이는 데 실패했다. (278쪽)
그리고 이 제의가 아버지의 파랑새 신화를 완전한 실패로 만든다. 대신에 그녀가 탄생시키는 것은 욕망의 뿌리를 캐기 위해 자신을 끝까지 파헤친 자리, 그 상처의 흔적에서 태어나는 한 마리의 ‘피에 젖은 새’다. 욕망의 윤리학을 따라 그녀는 피에 젖은 새로 거듭난다. 이 거듭남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상징계의 수동적인 타자에서 상징계 바깥의 규정 불가능한 그 무엇으로, 그녀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성장 신화를 전복하면서 마침내 성장한다.
파랑새와 피에 젖은 새의 색채 차이를 지적하면서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신화를 전복하는 일은 언제나 피를 요구한다. 성장소설을 표방한 많은 성장 신화들이 성장의 색깔을 성급하게 푸른색으로 칠해왔지만, 따라서 사실 진정한 성장의 색깔은 우선 핏빛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피 흘린 자리만이 존재의 ‘푸르른 틈새’로 남을 수 있다. 권여선은 그 사실을 아는 작가다. 감히 말하건대, 성장소설이라는 범박한 범주 아래에서 그녀는 하나의 독자적 장르다.
5. 맺으며
1996년의 책을 2007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내면서, 권여선은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십 년도 더 지난 옛 책을 다시 내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십 년 전에 처음 책을 낼 때 읽어주었으면 했던 나이의 독자들이 있었다. 지금 그 나이가 된, 십 년 전에는 코를 흘리거나 준비물을 빼먹고 다녔을 그들, 그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수줍은 소녀가 낯을 가리듯 이 책은 독자들의 나이를 가린다. (308쪽)
추측건대 그녀가 《푸르른 틈새》를 쓰면서 겨냥했던 독자층은 아마도 이삼십 대의 청년층이었을 것이다. 1996년 그녀의 나이가 그들과 엇비슷했고, 주인공 미옥의 나이 또한 그들의 나이와 엇비슷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의 성장소설을 진짜 필요로 하는 곳은 따로 있지 않을까.
내가 십 년도 더 지난 옛 책을 비평하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윤리적 성장은 생물학적 나이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그 윤리가 라캉의 이론에 기대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자신 안에 수동적으로 기입된 구조의 질서를 반성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몇 년이 지나도 성장은 없다. 이 책은 그런 이들에게 읽혀야 한다. 그들 앞에서 ‘십 년도 더 지난’ 이 책은 늘 새롭다.
참고문헌
권여선, 《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2007.
김 석,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 김영사, 2010.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최현주, 《한국 현대 성장소설의 세계》, 박이정, 2002.
- 신형철은 라캉의 윤리학을 진실의 윤리학이라 정의한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이 문득 일어난다. 그와 더불어 ‘나’의 삶이 고장나고 ‘세계’라는 현실이 붕괴한다. 그러나 그 고장과 붕괴 속에 진실이 있다면? 그 진실을 포기하지 않고 붙드는 일이 윤리적인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윤리학은 진실의 윤리학이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65-166쪽.) [본문으로]
- 이 글의 소설 본문 인용은 모두 권여선, 《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2007.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하 인용문은 괄호 안에 쪽수만 표시한다. [본문으로]
- 해수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것은 그녀가 상징계에서 남근의 역할·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남성과 여성의 두 범주를 라캉 식으로 분류할 때, 이것은 섹스의 차원이 아니라 젠더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머리글 151126, 본문 15 봄)
(제목은 신형철,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에서 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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