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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랗게 번져나가는
- 이제니의 <잔디는 유일해진다> -
너의 손목에는
리본이 길게 이어져 있다
흩날린다 흩날린다
손목에서 리본이
리본이 리본이 푸른 리본이
얇고 가늘게 하늘거리는 기분
흩날리고 흩날리면 쓸쓸해지겠지
리본의 기분
그것은 유일한 기분
말할 수 없이 좋고 슬픈 기분
고향에서는 잔디를 잔듸라고 썼다
유일한 잔듸의 유일한 기분
그것은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
푸른 푸른 푸른 들판 들판 들판에
잔듸 잔듸 잔듸의 기분 기분 기분아
잔디는 자란다
저마다의 속도로 각자 유일하게
그림자인 척하면서 하나하나 고유하게
어렴풋이 무리 지어 드넓게 번지는 것은
잔디의 마음이 너그럽고 강하기 때문에
눈물 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네가 말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눈물 난다
나는 그것을 쓰려고 한다
나는 그것을 쓰고 싶다
푸룬 푸룬 푸룬 잔듸 잔듸 잔듸야
잔듸 잔듸 잔듸의 마음 마음 마음아
틀린 맞춤법이 언제나 슬프고 좋았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머리를 빗고 다시 생각해보자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사랑하여라
이중의 거울 위를 미끄러지듯 비추는
내 속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그 목소리
흔들린다 흔들린다
흩날린다 흩날린다
손목에서는 푸른 리본이
들판에서는 푸른 잔디가
너를 찾고 싶은 시절 이후로
너를 잃어버린 오늘의 내가 있다고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고 쓰면
그것은 다시 찾을 수 있다라고 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잔디는 자란다고
리본은 흩날린다고
푸른 푸른 푸른 들판 들판 들판에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유일해진다고
- 이제니, <잔디는 유일해진다>
시는 서사 문학이 아니다. 이 명제는 당연한 것이지만,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명제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다보면 우리는 가끔 그 속에서 성급하게 인물·사건·배경을 건져 올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런 충동의 발현이 성공적인 독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물론 많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재구성해볼 수가 없는 시라면? 난해해 보인다는 이유로 이런 시들을 놓친다면 슬픈 일이다. 시는 서사 문학이 아니고, 따라서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없는 바로 그 지점에 여전히, 좋은 시 혹은 시의 좋은 것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니의 <잔디는 유일해진다>와 같은 시를 만났을 때, 성급한 충동이 앞선다면 우리는 이 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자문하게 될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이 글이 내리는 답은 다음과 같다. 이 시는 너의 손목에 감긴 푸른 리본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아마도 정맥을 가리키는듯한 이 푸른 리본은 그 색깔과 가느다란 형태 때문에 시인에게 잔디를 연상시킨다. 한 덩어리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저마다 고유하게 자라나는 잔디. 시인의 고향에서는 잔디를 잔듸라고도 썼던 모양이다. 고향에 계셨을 시인의 어머니 또한 그런 틀린 맞춤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너, 고향, 어머니. 이들은 모두 현재 시인의 곁에는 없는 것들이고 그래서 전부 과거시제로 씌어지는 것들이다. 그런데 너의 리본도 고향과 어머니의 잔듸도 여전히 "그림자인 척하면서 하나하나 고유하게"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유일해"지고 있다. 과거의 것들이 현재에 되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억의 권능에 기대어서만 가능한 일이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 지나간 것들은 자꾸 유일한 무엇처럼 느껴진다. 유일한 것들을 상실했다는 슬픔, 그러나 그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믿음이 이 시에 애틋한 정서를 불어넣는다. 이쯤에서 정리하자. <잔디는 유일해진다>는 유일하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시인이 품고 있는 애틋한 마음을 다루는 시다. 좋다. 하지만 이것이 이 시의 전부일까?
감히 말하건대, 이제니의 시가 가진 진짜 매력을 맛보고 싶다면 '무엇을'보다는 '어떻게'를 묻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잔디는 유일해진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가 어떻게 유일해지고 또 어떻게 애틋해졌는지 추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컨대 이 시의 많은 부분은 가늘어지는 운동에 기대고 있다. "얇고 가늘게"라는 직언이 3연 1행에 등장하거니와, 그전부터 이미 시인은 한 줌 손목을 한 줄 정맥으로 치환함으로써, 그리고 이것들을 흩날리게 만들어 무엇인가를 털어냄으로써 자꾸 가늘어지는 어떤 실의 운동을 예비한다. 실낱같이 가느다란 정맥이, 잔디가, 시인의 기억이, 믿음이 시 전체에서 쓸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실상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다. 눈앞에 가시적인 증거가 없으니 이랬다저랬다 흔들리면서 자꾸 희미해질 수밖에. 이 흔들림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이제니의 시를 읽는 진짜 재미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니의 반복은 단순한 동어반복 그 이상의 효과를 낳는다. 이를테면 "푸른 푸른 푸른 들판 들판 들판에 / 잔듸 잔듸 잔듸의 기분 기분 기분아"와 같은 문장. '잔듸'가 세 번 반복될 때 두 번째의 잔듸는 첫 번째의 잔듸와 같지 않고, 세 번째의 잔듸는 두 번째의 잔듸와 또 다른 것이 된다. 반복을 거듭할수록 점점 가늘어지는 잔듸의 운동이 이러한 문장에는 있는 것이다. 유일하기에 하나를 빼앗기면 그것은 곧 전부를 빼앗기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들, 그런데 자꾸 가늘어지는 까닭에 점점 더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그것들이 반복을 통해 다시 또 가늘어지면서 시에는 시인을 "눈물나게 하는" 애틋함이 찾아온다.
이뿐인가, "어렴풋이 무리 지어 드넓게 번지는", 가느다란 것들이 모여 갱지에 잉크 물들듯 번져나가는 운동이 이 시에는 또한 존재한다. 가늘어지는 운동이 그러했듯 이 번짐 역시 물론 정태(靜態)가 아닌 동태(動態)다. "잔듸 잔듸 잔듸의 마음 마음 마음아"와 같은 구절을 보라. 마음을 부를 때마다 "잔디의 마음"은 점점 더 "너그럽고 강"해지는 것 같다. 별다른 수사 없이도 단순하고 소박한 반복이 이런 효과를 낳는다. 일상어로서의 '잔디의 마음'과 시어로서의 "잔듸 잔듸 잔듸의 마음 마음 마음"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가늘어지는 운동과 번져나가는 운동이 훌륭한 시적 리듬을 가진 이제니의 시 안에서는 동석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고 쓰면 / 그것은 다시 찾을 수 있다라고 쓴다"와 같은 시인의 희미한 믿음도 힘을 얻을 수 있다. 가느다란 것들이 어떤 힘으로 어떻게 번져나갈 수 있는지를, 또 번져나간 것들이 다시 어떻게 유일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는 이미 시를 통해 체험하였으므로.
‘체험’이라는 말을 이 글에서 두 번 썼다. 말마따나, 기실 이제니의 시를 읽는 일은 결국 체험의 문제다. <잔디는 유일해진다>를 포함하여 이 시인의 많은 시는 현실의 구체적인 풍경이 소거된 자리에서 씌어진다. 대신 단어들이 저들끼리 엉겨 붙거나 떨어져 나가면서, 스스로의 리듬과 율동으로 서사가 거의 제거된 시인의 시를 지탱하는 것이다. 이 리듬과 율동은 다른 말로는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오직 시인의 ‘그 말’이어야만 한다. “잔듸 잔듸 잔듸의 마음 마음 마음”을 ‘잔디의 마음’으로 바꿔 쓰는 순간 이제니 시의 가장 좋은 부분은 빠져나가버리고 없으므로. “잔듸 잔듸 잔듸의 마음 마음 마음”의 리듬에 실려 춤을 출 때에만 이제니 시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므로. 시인의 ‘무엇을’과 ‘어떻게’에 대해 길게 부연했지만, 사실 그러니까 이 글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독. 좋은 시는 하나의 서사로도 혹은 다른 말로도 전연 환원되지 않는다. 이제니의 시가 그렇다.
(1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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